당신이 이곳에서 교회되기를...

공지사항

목회철학

Your Pastor 2022. 3. 15. 15:06


이천예수소망교회를 세워가는 목회철학

 


목회 철학1 - 경건한 예배 / 
로마서 12:1-2, 레위기 19:2, 요한복음 4:23

 

 

목회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애굽의 노예에서 당신의 백성을 불러내시어 홍해를 건너 광야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말씀의 백성으로, 언약의 백성으로, 순종하는 백성으로 양육하셨습니다.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목회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더불어 먹고 마시며,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시고, 따르게 하신 모든 과정이 예수님의 목회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예수님이라면 하시는 일,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 목회의 첫째는 경건한 예배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창세기) 그 백성을 출애굽시켜(출애굽기) 예배하라(레위기) 하십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당신의 백성에게 거룩하라(19:2).”하십니다. 거룩은 세상이 하지 않는 것이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거룩경건이라는 말로 대신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방법이며 동시에 세속에 물들지 않고(1:2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활(딤전4:7-8)입니다. 경건은 곧 몸과 마음의 정결함(purity)을 준비하고, 이웃을 사랑(love)하며, 하나님께 충성(royalty)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이 경건한 예배자 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영과 진리의 예배(4:23)”는 우리의 심령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예배, 진리이신 예수님의 그 말씀을 받으며 드리는 그 예배였고,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건한 예배입니다. 또한, 경건한 예배는 바울의 증언처럼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영적 예배이며,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사는 삶의 예배입니다(12:1-2). 성도는 예배 잘 드리다 죽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교회, 삶에서의 예배가 예배의 삶으로 이어지는 교회, 곧 경건한 예배가 있는 교회를 함께 세워갑시다. 성도 한 분, 한 분이 진정한 예배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목회 철학2 - 안식의 주일 / 마가복음 2: 27-28

 

 

“Wag the dog - 꼬리가 개를 흔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바뀐 것입니다. 본말이 전도되거나, 앞뒤가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적반하장, 주객전도가 그런 뜻의 말입니다.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들고, 주인과 객이 바뀐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평안을 누리는 날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안식일을 정하여 쉬셨고(20),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신 날로 안식일을 정해주셨습니다(5). 그러니 안식일은 쉼의 날이요, 해방과 자유를 기뻐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날을 대대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는 이 소중한 안식일이 끔찍한 날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안식일이 더는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위한 날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안식일이 심각히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이 그날을 지키는 데 오히려 수많은 규정이 있어 불편했고, 고통스러웠고, 자유가 없었으며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난받으시면서도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고, 생명을 살리셨으며, 말씀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27).”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28). 우리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안식일의 정신을 따르며 이날을 안식의 주일로 지킵니다. 주일은 죽음과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구원의 은혜와 천국의 생명을 누리는 자유의 날이요, 주의 말씀 안에서 진정한 영적 평강과 육신의 쉼을 누리는 날입니다. 이날에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행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일하심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과 자유와 평안과 쉼을 나누며 살 것입니다. 이날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와 경건한 예배를 드리고, 성도 서로 간에 감사와 용서와 사랑과 평강을 경험하며 나눕니다. 우리는 안식의 주일을 지킵니다. 그것이 주일성수의 의미가 됩니다.

 

 


목회 철학 3 - 일상의 기도 / 누가복음 22: 39-46


존경받는 복음주의 설교자였던 토저(A.W. Tozer) 목사님은 오늘의 교회가 가진 근본적인 3가지 문제를  믿는 자가 성장하지 않고 항상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으며 다만 살만 찐다,  믿는 자가 교회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오직 참관만 한다,  믿는 자가 서로 일치되지 않고 분열과 다툼만 일삼는다. - 라고 말합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아는 영성으로만 가능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영성은 곧, 하나님을 알아는 것이며, 그것은 기도하는 마음과 삶을 이릅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사람, 곧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저는 한 주간을 보내면서 나는 영적인 사람인가?’를 되물었습니다.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내가 기도하고 있는가?’ 물으며, 그 마음과 삶으로 지내 왔습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내 감정과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에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를 온 마음과 몸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의 세 번째 목회 철학은 일상의 기도입니다. 특별한 날에,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사건에 기도하는 것이 아닌, 날마다 매일의 삶에서, 순간순간 주를 바라며 기도하는 일상의 영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으로 주신 말씀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입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22:39)”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곳곳에 예수님이 습관적으로 하신 일이 기도입니다. 모든 일에 앞서 기도하셨고, 기도하며 행하셨고, 마치신 후 기도하십니다. 몸에 자연스럽게 익혀진 습관은 결국 그 사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그 마음과 몸에 자연스럽게 익혀지신 분입니다. 익혀졌기에 힘들지 않았습니다. “일상의 기도를 자연스럽게 익혀갈 때,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급하게, 갑자기 기도할 때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지요. 기도하는 자가 깨어 있습니다. “일상의 기도를 매일의 삶에 이루어가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목회 철학 4 – 교회된 가정 / 시편 128: 1-6

 

종교개혁자 깔뱅(Jean Calvin)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정의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성도가 이룬 가정은 그 하나로 작은 교회가 됩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작은 교회이기에, 가정 역시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정을 믿음으로 세워가고, 가정은 교회와 전적으로 연합하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말씀으로 양육되며, 하나님의 축복과 기적이 경험되는 믿음, 소망, 사랑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축복은 가정의 축복이며, 교회에서 받은 말씀은 가정에 주신 말씀이고, 교회의 기도가 가정의 기도가 됩니다. 믿음의 가정은 교회와 더불어 복을 받으며, 강건히 세워집니다.

 

우리는 시편 128편에서 교회된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축복의 말씀을 듣습니다. 교회의 성도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이며, 그들의 가정에는 포도나무감람나무의 복이 있습니다(3). 구약시대의 포도나무는 결실과 풍요를, 감람나무는 정결과 직분 세움을 상징했습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포도나무를 예수님과 교회와 관계로, 감람유를 임직식과 예배의 상징적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된 가정시온예루살렘으로부터 임하는 번영과 자식의 자식이 이어지며 얻게 되는 평강을 복으로 더하십니다. 예루살렘, 시온의 성전으로부터 임하는 복을 가정에서 누리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가정에 주시는 복은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것으로 표현됩니다(2). 가족은 서로의 손으로 노동하며 수고하여 얻은 열매를 음식으로 나눕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은 수고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서로의 수고 안에 형통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서로의 수고를 인정하며, 기뻐하며, 격려하며, 감사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은 형통의 복을 더하십니다. 서로의 수고로 세워진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 이천예수소망교회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작은 교회된 가정들을 세워갈 것입니다. 교회의 행복이 가정의 것되고, 가정의 행복이 교회의 것 될 것입니다.

 

 


목회 철학 5 - 자원적 봉사 / 고린도후서 8: 1-7


예수님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수건으로 닦아 주십니다. 제자들은 송구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13:5).” 예수님은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마음(13:1)에서 기꺼이 겸손히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못 박힐 예수님의 발을 여인들이 향유를 부으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림같이, 예수님도 복음 전파를 위해 부르트도록 다닐 제자들의 발을 사랑의 마음으로 자원하여 닦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섬김을 받았던 베드로는 훗날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벧전 5:2).” 가르쳤습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봉사는 억지로 하거나, 어쩔 수 없이 하거나, 할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베푸신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려는 자원적 봉사이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은혜라는 말로 성도들의 연보, 봉사, 섬김을 표현합니다. 바울의 증언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였다(3)”-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으로 감당한 일이었고, 극심한 가난에도 풍성히 감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원적 봉사였습니다.

 

자원적 봉사가 아니면 힘이 들어 이내 지치고 맙니다. “자원적 봉사가 아니면, 자기 자랑과 교만이 되고 맙니다. 결국 봉사하다가 믿음 잃고, 넘어지는 것은 은혜와 사랑에 대한 보답의 마음에서 이루어진 자원적 봉사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은혜로 감당하면 시험이 없습니다. 사랑하여 감당하면 아깝지 않습니다. 감당할 힘도, 시간과 여건과 물질과 건강과 믿음도 다 하나님이 주십니다. 주가 주신 그것으로 감당할 뿐입니다. 그러니 더욱 은혜가 됩니다. 베푸신 주의 사랑과 은혜에 순전히 자원하여 보답하려는 그 마음에만 봉사와 섬김과 봉헌의 진정한 기쁨이 샘 솟듯 솟아날 뿐입니다.




목회 철학 6 - 익명적 헌신 / 누가복음 17: 5-10, 마태복음 6: 4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바리새인들보다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는 줄 아느냐?’ 하시면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서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7)?”- 종은 집안의 일, 곧 밭을 갈고, 양을 치고, 식사를 준비하고, 수종을 듭니다. 종은 맡겨진 일을 하면서 조금의 보상이나 칭찬을 요구하지 못합니다. 그가 종이 됨으로써, 자신이나 가족의 빚을 이미 청산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그를 종으로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죄인으로 감옥에 갇히거나 실형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0)”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오직 무익한 종으로 고백하며 겸손히 자신을 내려 놓으라 하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심판받아 죽게 된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한다면 내가 무엇을 내세워 자랑하거나 영광을 구한단 말입니까? 감당한 그 어떤 헌신으로도 자랑할 수 없고, 자신의 영광을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보십니다. 은밀한 중에 감당하는 우리의 모든 선행과 헌신을 하나님은 갚아주십니다(:6-14).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마땅히 은혜를 따라 헌신할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봉사와 섬김과 구제라는 헌신은 내 이름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교회는 은밀한 중에, 나를 감추며, 더욱 낮아져 익명적 헌신을 하나님께 올릴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헌신이 되도록 마땅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그 뜻을 따라 사람의 칭찬이나 영광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익명의 뒤에 숨어 나태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 철학 7 – 종말론적 삶 / 요한복음 5:24, 갈라디아서 2:20.


인간은 자기가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생소한 것이고,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누구나 죽는다는 것, 죽음은 연습이 없다는 것,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 내가 죽는다는 것, 내 뜻과 상관없이 죽는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죽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다 하면서까지도 사람의 목숨을 붙들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세상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살고 죽는 인간이 할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직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실 수 있는 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으로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주님과 함께 영생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본 교회의 7번째, 목회 철학은 종말론적 삶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은 첫째, 누구나 다 이 땅에서 한 번의 생을 살다가 필연적으로 이 땅을 떠나게 되어있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입니다. 둘째,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이미 그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믿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입니다. 셋째,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내적으로는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맺고 외적으로는 생명의 열매(복음 증인이 되어 구원받은 성도)를 맺는 성도의 삶입니다. “종말론적 삶은 교회로 교회가 되게 할 것입니다. 천국을 사는 기쁨이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도 주님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written by. 이천예수소망교회 정동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