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66-69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 혹독하고 모진 고문 끝에 로드리고 신부가 땅에 놓인 예수님의 화상을 밟고 배교려는 순간, 신부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진 것이다.” 배반자의 배교와 예수님의 연민이 부딪치는 순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치사하고 더러운 것 중의 하나가 은혜를 배신하고 신의를 저버리는 것 아닐까요?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다음날 그 소식에 수많은 사람이 다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제의 그 떡을 주시려 하지 않으시고, 다른 떡을 주시려 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생명의 떡을 준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생명의 떡, 영생의 떡, 주님의 살의 떡을 주신다고 하니, 군중들의 기대는 무너집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불평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곧 영이요, 생명(63)”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려는 떡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려는 것과 사람들이 구하는 것의 간격에서 말입니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가고 다시는 함께하지 않습니다(66). 예수님은 남아있는 열두제자들을 보시며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우리가 구하는 것과 주님이 주시려는 것이 달라 갈등하며, 배신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물으십니다. “눈에 보이는 떡을 위해 생명의 떡을 거부할 것이냐?”“너희도 영생의 말씀을 배반할 것이냐?” “너희도 가려느냐?” 그날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68)?”라고 대답했습니다. 교회는 이 고백으로 존재합니다. 성도는 이 고백으로 살아갑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베드로를 순교자로 지켜주신 것처럼, 주의 말씀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주의 말씀 안에 영생이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Your P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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